여러분은 헤어진 연인의 사진이나 편지,
선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나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옛 연인의 기억을 지우는 이야기를
몽환적인 연출로 풀어낸 로맨스 명작입니다.

이별 후 흔적을 지우는 일반적인 행동에
감상적인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꾸려냈죠

저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사랑의 순수성’이라 느꼈는데요

현실에선 많은 사람들이 부정하는 말이죠.

때문에 주인공 커플이 싸우는 모습은
순수하기는 커녕, 너무도 평범하고 너저분합니다.

관객들이 쉽게 공감하는 이 현실커플 모멘트는
흔한 연인들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데요
감독은 이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커플에게서 
순수한 사랑을 찾고 있죠.

이 작품의 영어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티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 입니다.

영화는 순수한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조엘의 뇌 속으로 깊이 들어가죠

그 안에 등장하는 ‘클레멘타인’은
기억의 공간에 반영된 ‘조엘의 마음’입니다.

조엘은 클렘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는 게 두려워서
그녀를 끌고 이 곳 저 곳을 도망다니죠.

여러분은 연인과 헤어진 후,
물건을 버린다고 마음이 버려지던가요?

조엘과 클렘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억을 지운다고,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죠.

‘티없는 마음’이란
물건과 뇌세포같은 물리적인 것이 닿을 수 없는
의식 깊은 곳의 ‘자아’를 의미합니다.

그 곳에는 ‘영원한 햇살’
지워지지 않는 사랑이 비추고 있죠.

그래서 기억을 지운 다음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일어난 조엘은 
영문도 모른채 ‘몬톡’을 향합니다.
가장 깊은 자아에 남아있는,
사랑이 시킨 행동이죠.



영화의 오프닝은
기억을 지운 다음날입니다.

처음보는 잠옷을 입고
자동차 문이 왜 망가졌는지 모르는
알 수 없는 의문들이 가득한 날이죠.

출근기차를 기다리던 조엘은
갑자기 반대편 플랫폼으로 건너가
몬톡행 열차를 탑니다.

그는 기억제거 시술의 마지막에
클렘과 몬톡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죠.

하지만 이는 조엘의 꿈이었습니다.
진짜로 클렘과 약속한 게 아니죠.
게다가 이 장면조차 기억에서 지워졌습니다.
그가 몬톡을 향하는 이유는
약속이나 기억이 아닌 거죠.

‘기억 너머의 의식’에는
여전히 클레멘타인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억만 사라진 상태죠.

인간은 ‘공백’을 불편해합니다.
어떻게든 채워넣으려하죠.

하지만 조엘은 비어있다는 사실도 모르기에
왜 답답한지도 모른채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기억이 비어있는 시작점인
‘몬톡’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거죠.

해변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자꾸만 서로가 눈에 들어옵니다.
잃어버린 퍼즐조각이니까요

결국 둘은 서둘러 공백을 채우려는 듯
가장 강렬한 추억의 장소까지 방문합니다.
조엘도 평소와 다르게 적극적이죠.

다시 멀어지는 것도 순식간입니다.
메리가 보낸 녹음을 듣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되는데요

그런데 클렘은 
녹음 테이프를 다 듣고도 조엘을 찾아가고
조엘은 떠나는 클렘을 붙잡았죠.

똑같은 이유로 싸워도 ‘괜찮다’라면서
둘은 다시 관계를 이어가게 됩니다.

왜 그런 걸까요?



이 커플이 기억을 지우지 않았어도
다시 이어질 수 있었을까요?

조엘과 클렘은 정반대의 사람이죠
조용하고 소극적인 조엘과
충동적이고 적극적인 클렘

둘은 서로의 다른 점을 좋아했습니다.
나중에는 이 차이로 인해 다투게 되죠.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관계는 왜 달라질까요?

우리는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람을 인지할 때
‘나’를 인지하는 뇌의 부분과 
가까운 부분이 활성화 된다고 합니다.

가족, 친구, 연인같은 존재를
‘나’처럼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이들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내맘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더욱 화가 난다고 하는데요

서로의 다른점이 처음에는 신기했고
연인으로 발전하게 만드는 매력이었지만
가까운 관계로 발전한 후에는, 
통제되지 않는 골치아픈 부분이 된 거죠.

상대방을 생각하는 내 ‘감정’이
그 사람의 외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결정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병원의 직원 패트릭과 스탠은
기억이 지워진 사람의 정보를 이용해서
관심을 얻고 연애를 시작하는데요

하지만 두 여자 모두
결국엔 자신이 원래 사랑했던 사람을 쫓고
두 남자는 외면받게 되죠

상대방이 뭘 좋아하는지 알고
이를 열심히 따라하지만
기억의 공백을 자극하는 불쾌함만 커질뿐
이들은 다시 원래 사랑을 찾아갑니다.

이처럼 영화는
사랑은 물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순수한 근원을 가졌다 말하는데요

그럼에도 이 감정을 구체화하는 것이
‘기억’이라는 요소임을 잘 활용하고 있죠.

사랑을 반영한 기억의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져 있을까요?



기억제거 시술을 받는 조엘은 
클렘에 대한 기억들이 연결된 곳을 떠돕니다.
각자 다른 시간과 공간의 기억이
마치 하나의 사건처럼 이어져 있죠.

기억은 현실을 모아놓습니다.
실제 사건이 아닌, 재구성된 현실이죠

자의적으로 재생산된 기억은
결국 나의 무의식을 반영합니다.
조엘이 꿈에서 대화를 나누는 클렘은
진짜 클레멘타인이 아니라, 조엘 자신이죠.

앞서 말했듯이 두 사람의 싸움은
서로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내가 괴로운 나의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 했죠.

그래서 헤어지면 후련하겠거니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미워 죽겠는데 보고싶고
생각나면 또 괴롭죠.

그래서 클레멘타인은 기억을 지워버립니다.
기억이 괴롭다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연인에게 나를 투영했듯이
기억은 나의 마음을 투영했을뿐입니다.

여전히 괴로움의 원인인
‘나’와 ‘나의 마음’은 그대로죠.

상대에게서 나의 문제를 찾던 조엘은
꿈에서 연인의 모습을 한 자신과 대화합니다.

가장 부끄러운 기억들과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는
자아의 깊은 곳을 반영한 곳에 들어가서
자신의 문제들을 되짚어보죠.

이 과정은
조엘이 자아를 탐색하는 과정인 동시에
클레멘타인에게 진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연습과도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조엘의 꿈만 묘사하지만
클렘도 같은 과정을 겪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죠.

서로를 비난하는 테이프 녹음은
각자의 부끄러운 내면을 드러내는 첫 단계입니다.
지난날의 실수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과정이죠.

이로써 두 사람은
이 관계의 문제가 서로가 아닌
자신에게 있었음을 인정하고 새로 시작하게 됩니다.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만은
<존 말코비치 되기>로 영화계에 데뷔했습니다.
이 때의 각본으로 각종 비평가상을 휩쓸었죠.

그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남의 머릿속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통해
육체를 지배하는 ‘진짜 정신’
‘자아’에 대한 생각을 풀어냈는데요

그 영화에 짧지만 중요하게 등장한 커플이 있습니다.
‘엘로이즈와 아벨라르’라는
중세 플라토닉 러브의 대명사 커플인데요

이 영화의 제목
‘티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이
이 두 사람에 대한 알렉산더 포프의 시에서 유래했죠

둘의 이야기를 간단히 말해보자면
촉망받는 신학자 아벨라르는
어린제자 엘로이즈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여러 사건과 오해로 아벨라르는 거세당하고
두 사람은 멀리 떨어진 수녀원과 수도원으로 갈라지죠.

이후 둘은 평생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신적인 사랑만 나누는 관계가 됩니다.
이 이야기가 후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알렉산더 포프는 이들의 편지를 읽고 시를 남겼죠.

미셸 공드리 감독과 찰리 카우프만 작가는
이 커플의 이야기로 함께 작품을 만듭니다.

마음 깊은 곳에 순수한 사랑을 가진
두 사람의 영원한 햇살을 이야기하는 영화죠.

공드리 감독은 이후에
짐캐리와 또 함께 작업을 하게 되는데요
퍼펫쇼를 하는 어린이 프로 진행자의 이야기
<키딩>이라는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밝게 웃는 TV쇼의 얼굴 뒤에 감춰진
상처받고 고통에 빠진 내면을 다루는 작품이죠.

이 두사람의 작품들은 모두
인간이 존재하는 물질적인 세계와
이를 보여주는 외적인 모습이
결국 내면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해왔고
널리 알려진 주제라고 볼 수 있지만
이들의 표현력은 특별한 매력을 가지고 있죠.

공드리와 카우프만의 작품은
현실을 공상세계처럼 표현하고
가상의 공간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내면과 외면의 경계를 허물고
물감이 섞인 듯 혼란스럽게 만들죠.

특히나 <이터널 선샤인>의 경우엔
영화의 분위기 마저 혼란스럽습니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인지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인지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분간할 수 없도록 만들죠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엔딩은
두 사람이 결국 또 헤어지지는 않을지,
다시 기억을 지우러 가는 건 아닐지 걱정됩니다.

물론 현실세계에는 ‘라쿠나’ 같은 서비스는 없죠
다만 누구나 괴로운 기억은 가지고 있고
이를 지우거나 묻어버리려 애쓴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란
지울 수 없는 기억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쉽게 지울 수 있었다면
괴롭거나 신경쓰이지도 않을테니까요.

사랑의 문제도, 삶의 문제도
가장 근원적인 부분부터 돌아봐야겠다고 느낀
저는 영사기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댓글로 남겨주세요
구독과 좋아요는 큰 힘이 됩니다.
오늘도 긴 영상 시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디즈니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
<위시>가 드디어 개봉했습니다.

지중해에 위치한 가상의 섬나라를 배경으로
마법에 담긴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클래식한 구성의 작품이었는데요

디즈니는 <위시>안에
무려 100여개의 오마주가 숨어 있다고 밝혔습니다.

영화의 틀이 되는 화면비율부터가
1959년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같은
2.55:1의 비율로 제작되었죠.

저는 이 영화가
‘모든 사람이 별의 희망을 품고 있다’
라고 말한다 느꼈는데요


이번 작품의 최고 귀요미이자
상징적인 캐릭터는 별 ‘스타’죠.

미키를 닮은 하트모양의 얼굴형에
피노키오의 소원과 희망을 담은 이 캐릭터는
오랜시간 세상에 영감을 주려 했던
디즈니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월트 디즈니’ 한 사람의 꿈이
100년의 세월이 지나 지금의 모습이 된 것 처럼
누구나 마음에 품은 ‘소원’을 통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말하고 있죠.

영화는 아주 쉽고 빠른 전개를 가졌지만
각각의 캐릭터는 오랜 역사와 넓은 스펙트럼을 담아내
작품을 들여다 볼수록 깊고 풍부하게 느껴졌습니다.

먼저 주인공 ‘아샤’는
전통적인 디즈니 프린세스인 동시에
요정 대모의 정체성을 담아냈고
의적 로빈 훗의 성격도 보여줬죠

메인빌런 매그니피코왕은
자파, 말레피센트, 스카, 우르슬라 등
역대 디즈니 빌런들의 특징을 모아
고전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그럼 영화 <위시>가
어떤 장면과 캐릭터들을 가져와
자신들의 100주년을 기념하는지 알아볼까요?



오프닝은 옛 디즈니 만화들처럼
커튼을 지나 동화책을 펼치며 시작합니다.

매그니피코왕이 로사스 왕국을 세우는 과정을
짧게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죠.

이어서 주인공 아샤의 가족이 등장하는데요
아샤의 할아버지 사비노는 100세 생일을 앞두고 있죠.

그는 ‘디즈니’를 상징하지만 
겸손하고 소박하게 연출됩니다.
오늘날 거대한 컨텐츠 공룡이 된 디즈니와는
겉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죠.

사비노는 다음 세대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술을 하고 싶어합니다.
마지막에는 영감을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하고 싶다고 말하죠.

디즈니의 정신과 자세가
오늘날 달성한 물질적 성과를 
목적으로 하지 않음을 표현합니다.

이어서 아샤의 친구들이 등장하는데요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에서 모티브를 얻은
그녀의 친구이자 주요 조력자들이죠.

쿠키를 굽는 달리아는 ‘박사’
김신영을 닮은 가보는 ‘심술이’
재채기를 하는 사이먼은 ‘재채기’
소리없이 나타나는 바지마는 ‘부끄럼’
재채기한 쿠키를 먹는 다리오는 ‘멍청이’
귀걸이를 한 짧은 머리의 할은 ‘행복이’
덩치 크고 기운 없는 사이먼은 ‘졸음이’

각자 오리지널 캐릭터의 첫 알파벳을 따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들은 캐릭터가 많아서 
모든 인물이 충분히 조명받지는 못했죠
가장 많은 분량을 얻어낸 캐릭터는 졸음이 사이먼과
심술이 가보, 박사 달리아 였습니다.

특히 부정적인 자세를 보이던 심술이 가보는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순간에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를 던지는데요


‘뛰어내리면 떨어지는 게 아니야’ 라면서
고소공포증을 이겨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립니다.

영화 초반에 나온 매그니피코의 이야기는
실패와 좌절의 슬픔을 피하려는 자세를 보여주죠.
하지만 좌절을 피하려던 그의 소원 마법은 
결국 소원 자체를 빼앗아버리는 결과를 냅니다.

마법에 기대 소원을 이루려는 사람들은
두려움과 좌절의 가능성은 사라지지만
동시에 행복 역시 빼앗기죠

할아버지 사비노가 
다음 세대에 영감을 줄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아도
계속 음악을 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스스로 도전한다면 실패는 추락이 아니라
경험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매그니피코와 반대로,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진 ‘스타’는
소원을 들어주냐는 물음에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럼 별은 왜 내려왔고, 무슨 힘을 가졌을까요?

 



‘별’의 가장 깊은 모티브는
아주 오래된 작품 <피노키오>에서 옵니다.

피노키오는 별을 보며 
진짜 사람아이가 되고싶다 기도하죠.

하지만 푸른요정은 그의 소원을 
그냥 한 번에 들어주지 않습니다.
피노키오가 유혹에 빠져 실수를 하고
제페토 할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인간의 마음을 가지게 된 후에야
마법으로 겉모습을 바꿔주죠

엔딩의 푸른요정은
우리가 마법의 힘을 기억하게 만들었지만
진정한 마법은 마지막이 아니라
피노키오의 모험 과정에서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스타’는 소원을 들어주지 않죠.
영화 마지막에 왕국의 모습이 변한 것처럼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와 다르게 매그니피코왕은
자신이 고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죠.

그의 행동은 <인어공주>의 빌런,
‘우르슬라’에서 왔다고 느꼈습니다.

문어를 모티브로 한 ‘우르슬라’는
사실 주인공 에리얼의 고모인, 왕족입니다.
디즈니의 빌런들은 높은 신분인 경우가 많죠

그녀는 에리얼에게 다리를 주는 대신, 목소리를 가져갑니다.
말하는 능력, ‘나를 표현하는 힘’을 빼앗아가죠.

매그니피코 역시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조건으로
소원이 무엇인지 기억할 수 없게 만듭니다.
국민들의 소원을 빼앗아가서, 스스로 이룰 수 없게 만들죠.

그는 행동만이 아니라
외적인 것도 여러 빌런을 닮았는데요

후반에 사용하는 초록색 지팡이와 빛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빌런 ‘말레피센트’와 닮았습니다.
‘초록색’은 늘 빌런의 주요 컬러죠.
빛이나는 초록색은 ‘독성’을 가진 느낌을 줍니다.

매그니피코는 초록색을 두르고
<라이온 킹>의 ‘스카’처럼 노래를 부르죠.

왕의 얼굴은 맹수 같기도 합니다.
빌런 사자 ‘스카’의 눈과 닮았고
알라딘의 ‘자파’와 닮은 수염을 가졌죠.

뿐만 아니라 그의 서재에는
<백설공주>의 빌런 ‘그림하일드’가 떠오르는
수상한 액체가 끓는 유리병과 ‘사과’가 놓여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빌런을 투영한 매그니피코 왕이지만
영화를 본 대중의 반응은 의외인데요

소원을 들어주는 그의 국가 시스템이
아샤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입체적인 캐릭터긴 하지만
빌런이 주인공보다 지지받는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요?



매그니피코왕은 강한 ‘자기애’를 가졌죠
그의 성 안에는 그림하일드의 ‘거울’처럼 
반사되는 벽들이 등장합니다.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능력은
그의 독선적인 성격을 뒷받침하는데요
마법의 힘으로 ‘소원’을 통제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죠.

로사스의 국민들과 관객들이
그의 통치방식에 쉽게 동의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이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많은 사람이 행복한 선택이 정의다’
라는 ‘공리주의’가 바탕이죠.

개인의 행복을 모두 더한 것이
집단의 행복이 되기 때문에
공공의 행복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공평한 분배를 주장하게 되는데요


문제는 매그니피코의 정책이
행복을 분배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소원’을 이루지 못해 좌절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원이 뭔지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죠.

검열을 통과한 소원만이 이뤄지도록 해서
불행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행복의 양을 늘리는 사람입니다.
 
극단적인 공리주의의 문제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게되었죠.

그 결정권을 한 명의 개인이 가지게 되면서
로사스는 굉장히 무서운 형태의 독재국가가 된 셈입니다.

여기에 맞서는 젊은 혁명가 ‘아샤’는
숲 속에서 동물친구들을 만드는데요
1973년작 <로빈 훗>의 오마주가 여기서 등장합니다.

아샤를 돕는 커다란 곰의 이름은 ‘존’
로빈훗의 친구이자 일당의 유일한 일원인
곰 ‘리틀 존’에서 따온 캐릭터죠.

이에 어울리게 아샤의 계획은 ‘도둑질’입니다.
못된 왕의 돈을 훔쳐 나눠주던 의적 로빈훗처럼
국민들의 빼앗긴 소원을 되찾아주는 도둑이 되죠.

결국엔 아샤 역시
많은 이들의 행복을 원하는
‘공리주의’ 안에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손쉽게 뭔가를 이뤄주는 ‘마법’이기 때문에
매그니피코 왕의 손을 들어주는 현상이 나타나죠.

그러나 디즈니의 가치를 담은 아샤의 캐릭터는
마지막엔 ‘요정 대모’를 향해갑니다.
신데렐라에게 유리구두와 호박마차를 선물한 존재죠.

그녀의 마법은 대단하지만
12시라는 시간제한이 있습니다.
모든 걸 공짜로 주는 건 아닌 셈이죠.

왕자와의 결혼이라는 행운을 그냥 주지 않고
그걸 이뤄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기회를 빼앗은 계모와 언니들에게서 되찾아준 거죠.

마법이 모든 걸 해결해주길 바라는 건
인간이 언제나 바랬던 일이지만
디즈니는 항상 같은 주제를 말해왔습니다.

‘마법’은 도구가 되는 능력일뿐
실제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희생과 도전이 필요하다고 말이죠.


많은 관객들이 꼽는 <위시>의 아쉬운 점은
급격한 전개와 캐릭터의 깊이가 아닐까 싶은데요

저는 이 영화가 이런 단순한 형태를 취한 것이
과거의 작품들을 불러오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오마주를 담기 위한 편의성이 아니라
옛 이야기들의 의미와 감동이 들어갈 자리가 필요했던 거죠.

100주년 작품이라는 특별함을
‘역대 최고의 작품’ 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수많은 이야기에 담겼던 꿈과 희망을 되새기는 것’
으로 두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쿠키영상에 나온 그 짧은 소절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었겠죠.


하늘의 ‘별’이 하필 아샤를 선택한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하는데요

아샤를 ‘로빈 훗’으로 만들어준 숲속 친구들은
<밤비>의 캐릭터들도 담아냅니다.

곰 리틀 존과 어깨동무하는 ‘밤비’는 물론이고
바닥을 두드리는 토끼도 등장하죠

이들은 ‘스타’의 반짝이 가루 덕분에
사람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버섯들도 이 가루 덕분에 말을 하며
겨울왕국의 ‘I love crazy’라는 대사를 따라하죠

하지만 정작 스타 자신은 말을 하지 못하는데요

이 설정은 <피터 팬>의 ‘팅커벨’과 같습니다.
요정의 말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어서
팅커벨의 말과 행동은 딸랑거리는 종소리로 들리죠.

말을 못하고, 반짝이를 뿌리며
빨간실과 함께하는 모습까지
‘스타’는 ‘팅커벨’의 이미지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아샤는 팅커벨이 찾아온 존재,
‘웬디 달링’ 또한 담고 있는 캐릭터죠.

<피터 팬>에서 웬디는 
곧 성년이 되는 생일을 앞두고
어른이 되기 싫어 피터팬과 네버랜드로 떠납니다.
아샤도 마찬가지로 ‘소원’을 바치는
18살 생일을 앞두고 있죠.


이 로사나 왕국은 마법을 쓰는 왕이 있지만
가만보면 매우 현실적인 세계입니다.
매그니피코의 마법덕인지 풍족한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잊은채 평범한 일을 하며
독재자의 결정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죠.

그런 로사나에 ‘스타’가 내려옵니다.
디즈니의 꿈과 희망을 담은 존재죠.

이 ‘팅커별’은
웬디를 네버랜드로 데려가는 대신
네버랜드를 이 곳으로 가져옵니다.

스타의 반짝이 가루는 
동물들이 말하고 물건들이 움직이게 만들죠.
로사나를 동화 속 세계로 만드는데요

왕의 서재에서 마법을 난사하자
마치 <미녀와 야수>의 가구들처럼
온갖 집기들이 살아 움직입니다.
마법에 걸린 펜이 종이에 미키 마우스를 그리는
재미난 장면도 연출되었죠.

이렇게 ‘스타’는 
웬디를 피터팬으로 만들고
로사나를 진짜 꿈과 마법의 세계로 만듭니다.

그리고 아샤만이 아니라
로사나의 모든 국민들,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이

가슴에 별을 품고 있으며
누구나 피터팬이 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말하고 있죠.

영화 <위시>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새로운 스토리나
시선을 사로잡는 놀라운 디자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껏 디즈니가 밟아온 길을
반짝이는 희망의 별가루로 덧칠해주는
뜻깊은 작품이었다 생각하는 저는 영사기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댓글로 남겨주세요
구독과 좋아요는 영사기의 소원입니다.
오늘도 긴 영상 시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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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 애니메이션 장인
‘아드만 스튜디오’의 신작이 나왔습니다.
<치킨런>의 속편이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는데요.

‘너겟의 탄생’이라는 무섭게 입맛도는 부제로
또 한번 닭들의 반란을 보여줬습니다.

<치킨런>은 ‘자유’에 대해 말하는 영화였죠

2편에서도 비슷하게
‘갇혀있는 현대인’을 말한다고 느꼈는데요

자신들이 갇혀있는지조차 모르는,
세뇌에 빠진 펀랜드 양계장의 닭들처럼
우리도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져
자유를 빼앗긴 줄도 모르고 있다 말하죠.

저는 <치킨런>이 현대인을 가둔 감옥으로
‘디지털 세계’를 지목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즐길거리가 끝없이 솟아나는 인터넷에서
위험이 없는 가짜 모험을 하고
방 안에서 세상을 내다보면서
자유롭고 즐겁다고 착각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죠.

극 중 록키가 몰리에게 가르쳐 준 ‘팝콘’은
이런 안락한 기분을 주는 ‘컨텐츠’를 의미합니다.
모든 근심을 잊게 하는 도파민 자극제죠.

하지만 영화 후반에 몰리는
아빠가 가르쳐준 팝콘을 이용해
양계장을 탈출할 방법을 찾아내는데요

‘컨텐츠’가 가진 힘을
우리의 눈을 가리는데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자유를 향한 용기를 주는데 쓰라 말하고 있죠.

1편의 닭들은 물리적인 감옥에 갇혀 있었고
2편의 닭들은 정신적인 한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무엇이 이 매트릭스에서 닭들을 깨어나게 했을까요?



영화는 록키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1편의 내용을 요약해 관객들에게,
그리고 아직 달걀인 몰리에게 들려주죠

주인공 진저의 닭 공동체는
트위디의 양계장에서 도망친 후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딸 몰리가 육지로 나가고 싶어하고,
섬 근처에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목격하자
잊고 있던 공포가 되살아나고,
섬을 숨기는 결정을 하게 되는데요

이후 몰리를 구하러 나간 진저는
목걸이에 세뇌된 펀랜드의 닭들을 목격합니다.
그 순간, 자신들도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져
스스로 갇혀 살았다는 걸 깨닫죠.

파이나 너겟이 되는 삶은 아니지만
결국엔 숨어사는 삶에 불과했습니다.

1편에서는 생존을 위해 자유를 찾던 닭들이
2편에서는 생존이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하고 있죠


전작의 모티브는 <대탈주>라는 영화였습니다.
2차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던
76명의 연합군 포로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인데요

그래서 1편의 양계장은 우중충한 톤을 중심으로
나치독일의 수용소 분위기를 풍깁니다.
공군 마스코트였던 파울러까지
이 닭들은 ‘전쟁세대’로 느껴지죠

그래서 ‘요즘세대’를 표현하는 몰리는
‘전후 세대’로 보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
안락한 시대에 태어난 닭이죠.

진저는 록키에게 
‘우리는 모두 겪었지만 우리 아이들은 겪지 않아도 된다’
고 말하며 과거를 지난날로 치워둡니다.

목숨을 위협받는 억압이 없다는 건
삶이 훨씬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이죠
하지만 진저는 몰리에게 너무 많은 걸 숨깁니다.

몰리가 가출해서 프리즐을 만난 장면을 보면
차에 치일뻔한 몰리에게 ‘저세상’ 가고 싶냐고 하자
그녀는 ‘저세상이 뭔데?’ 라고 되묻죠

물론 펭귄도 모르고 발톱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세상을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도처에 위험이 있고, 그것을 극복해내야 하는
‘생존’에 문제가 있는 상태죠.

진저는 몰리가 위험에 처하느니
차라리 알 속에 있는게 더 낫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과보호하는 부모의 모습을 넘어서
삶의 자유를 빼앗는 행동이죠.

결국 이런 무방비 상태의 몰리는
섬 밖으로 나가 큰 위기에 처합니다.

두 어린닭은 왜
스스로 양계장에 들어갈까요?



펀랜드 트럭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바구니에 앉아있는 행복한 표정의 닭이죠
섬뜩하게 닭 머리가 박혀있던 
1편의 파이그림과는 대조적인데요

펀랜드의 전략은 닭을 속이는 겁니다.
바구니에 앉으면 안락하고 행복해진다는,
‘마케팅’을 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행복할 수 있다’는 유혹의 끝은
누군가의 ‘상품’이 되는 결말뿐입니다.
 
마케팅에 속는 현대인을 풍자할 때, 
과거의 노예에 비교하곤 하죠
신분과 물리적인 족쇄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상징적인 족쇄에 묶여 있다 묘사하는데요.


심지어는 가축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가축에게는 적당히 먹이를 주고 생존하게 해주지만
그 진짜 목적은 노동력과 상품을 뽑아내고
계속해서 새끼를 쳐 주인의 배를 불리는 것이죠

그러나 가축은 자신의 최후가 너겟이라는 
끔찍한 사실도 모릅니다.
행복하게 살았다고 세뇌당하니까요.

저는 ‘펀랜드 양계장’을 보며
영화 <아일랜드>가 떠올랐습니다.

<아일랜드>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자면,
인공장기를 판매하는 첨단 바이오회사가
알고보니 복제인간들을 가둬서 키운다는 이야기죠.

복제인간들은 ‘아일랜드’라는 파라다이스에 가기를 기다립니다.
추첨이 되면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즐겁게 떠나지만
사실은 장기가 적출되어 죽으러 가는 것이죠

펀랜드 양계장은 21세기의 기술사회를 보여줍니다.
첨단 기술이 가득해 보이는 이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탈출보다 침입이 더 어렵죠.

견고하게 가둬둘 필요가 없습니다.
일단 들어온 닭은 어차피 
스스로 나갈 생각을 안 하니까요

이 시리즈에서 양계장은
체제와 권력을 상징합니다.

1편의 양계장은 무서운 개들이 경비를 서고
철조망과 담벼락이 둘러싼 물리적인 체제였죠

2편의 양계장은 알록달록하고 화려합니다.
깔끔한 외관과 첨단 시스템을 갖췄죠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이름’과 ‘이미지’를 가졌다는 건데요

‘펀랜드’라는 ‘브랜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세상을 지배하는 힘은
‘기호’와 ‘상징’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죠.



이 영화는 사진을 이어 붙이는,
스톱모션 방식의 애니메이션입니다.
3D 애니메이션이 대세인 요즘 세상에
찾아보기 어려운 고전적인 작품이죠

아드만 스튜디오는 점토인형을 이용한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대표적인 회사입니다.

 300명의 인원이 500여개의 인형을 
4년 넘게 걸려 수작업으로 만들고
하루를 꼬박 작업해서 몇 초의 분량을 만드는,
장인정신을 발휘하는 회사인데요

그러나 이들이 과거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시대에 발맞춰 넷플릭스와 협업중이죠
<월레스와 그로밋> 6편도 넷플릭스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따라서 제가 앞서 말한 ‘디지털 세계’에 대한 해석은
기술발전을 거부하는 자세를 말한 것은 아닌데요
이를 활용하는 ‘자세’에 대한 해석이죠

비단 컨텐츠를 만드는 자세뿐만 아니라.
소비하는 태도에 대한 우려도 담겨 있다고 봅니다. 

가볍고 쉬운 내용을 빠르게 소비하는 성향이
이에 부응하는 컨텐츠를 양산하게 만든다는 거죠

그 결과, 깊은 고민이나 이해가 없어도 되는
쿨하고 펀한 것들이 인터넷을 채우고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옥수수 사료를 먹으며
생각없이 도파민에 젖어있는 닭들과 같죠.

‘옥수수’는 딱딱한 재료입니다.
펀랜드의 사료는 그라인더로 갈아서
색깔과 맛을 입힌 것으로 보이는데요

나중에 진저와 일행들은
이 옥수수가 담긴 저장고에 갇힙니다.
그라인더가 작동해 모두 죽을 위기에 처하죠.

그런데 그 순간 록키가 
옥수수를 팝콘으로 바꾸는 아이디어를 냅니다.
폭죽에 불을 붙인 건 창의력을 물려받은 ‘몰리’였죠

기술의 발전은,
컨텐츠를 수용하기만 하던 위치의 존재들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게 해줬습니다.

영화는 이런 세상의 어린 세대에게
‘팝콘’을 만들어 내라고 권장하고 있죠

몰리의 팝콘에는 어떤 힘이 있을까요?



목걸이가 채워진 닭들은 
‘두려움’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용감한’ 것은 아니죠.

용감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상태죠

이들은 팝콘의 재료인 옥수수만 받아 먹으며
정신이 마비된 상태로 너겟이 되길 기다릴뿐인데요

록키가 만들어준 팝콘은 과거의 방식입니다.
그는 몰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즐거움’을 주기 위해 팝콘을 만들었지만

몰리는 그 과정에서 가르침을 얻고
삶을 헤쳐나가는 지혜로 활용했죠.


동서양 어디에서나 어른들은
‘옛날 옛적에..’라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인류가 즐겨온 컨텐츠는 대부분
지난 시절의 지혜를 담고 있었죠.

아빠에게 배운 팝콘은 모두를 구해냈고
이를 통해 진저는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몰리와 함께 되돌아가 프리즐을 구해내고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치킨 게릴라가 되죠.

저는 영화를 보고,
몰리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요즘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고 편집해 컨텐츠를 만들 수 있죠.
하루에도 수십만개의 숏폼 컨텐츠가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이 좋은 기술로
모두가 멍때리는 영상만 만들고
서로를 세뇌하는 세상이 되고 있죠.


진저일당이 침투하는 과정에서
잠시 ‘아이패드’를 이용한 농담이 나옵니다.
이들의 보안 시스템이 대단한 기술인 척 하지만
알고보니 눈을 돋보기로 확대해서
사람이 직접 사진과 비교하는 방식이었죠.

첨단기술이 대단한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많은 것들이 오래된 것을 편하게 바꿔
디지털로 옮겨담은 것인데요

그걸 광고하기 위해 내세우는 ‘창의력’과 ‘생산성’은
기존의 도구들로도 가능한 것들이 많습니다.

많은 태블릿 이용자들이 경험하듯이
처음에만 이것 저것 좀 건드려보고, 
결국엔 넷플릭스나 유튜브 머신이 되기 쉽죠.

중요한 것은 
어떤 브랜드의 무슨 기계를 가지는지가 아니라
내가 그것으로 무엇을 해내느냐 아닐까요

<치킨런>은 1편과 2편 모두
핵심적으로는 같은 이야기를 한다 느꼈습니다.

‘억압’을 깨닫고, ‘함께’ 탈출해야 한다는 거죠.

주어진 안락한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유를 향한 날개짓을 해야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자유롭기 위해서
오늘도 고민하며 컨텐츠를 만들고
구독자분들도 함께 해주길 바라는
저는 영사기입니다.

여러분의 최애 팝콘은 무엇인가요, 댓글로 남겨주세요
구독과 좋아요는 영사기를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도 긴 영상 시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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